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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룩 (Christoph Willibald Gluck) 본문

클래식 (CLASSIC)/작곡가 (Composer)

글룩 (Christoph Willibald Gluck)

장미의 전쟁 2019. 4. 17. 16:30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독일)
1774년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 7. 2 ~ 1787. 11. 15)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1762년, 개정된 파리 판본
알체스테 1767년, 개정판 1776년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1779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로서 부친은 알렉산더 요하네스 글룩으로 로브코비츠 공과 그 밖의 대 귀족 밑에서 일한 삼림관이었다. 글룩이 3세 때에 부친은 가족을 이끌고 바이메론으로 부터 뵈멘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친은 글룩을 관리로 삼으려고 8세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게 하였다. 12세 때에 글룩은 뵈멘의 코모타우 마을에 있는 예수 교회의 칼리지에 보내져 18세까지 거기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어 프라하로 가서 성악, 바이올린, 첼로의 공부를 하였다.

또 체르노호르스키 신부 밑에서 교회 음악과 이탈리아 음악의 스타일을 배웠다. 이 무렵에 접한 이탈리아 풍 오페라는 그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4년 후인 1736년에 글룩은 빈에 진출하여 로브코비즈 공의 실내악 주자가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글룩은 오페라 작곡에 의욕을 불태우게 되었다.

우연히 글룩의 재능을 인정한 메르치 공은 1737년에 글룩을 밀나노에 데리고 가서 사마르 티니에게 사사하게 하였다. 4년간 사사받으며 작곡 기법을 연마한 글룩은 1741는 그의 나 이 27세 때에 최초의 오페라 《아르타세르세》를 밀나노에서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밀나노, 베네치아, 토리노의 가극장으로 부터 오페라의 작곡 의뢰가 쇄도하여 이후 4년간에 9곡의 오페라를 완성하여 공연하였다.

1745년, 글룩은 로브코비츠 공을 수행하여 런던을 방문, 이듬해 거기서 2곡의 신작 오페라를 발표하였으나 모드 실패하였다.

1750년 36세 때 빈의 유복한 은행가의 딸과 결혼데 이때부터 빈을 생활 근거지로 삼게 된다.

1752년 말 힐드부르크 하우겐 공의 초빙을 받아서 악장에 취임하면서부터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 무렵의 주요 작품에는《에치오(Ezio)》(1750),《황제 티토의 인자》(1752)가 있다.

1754년 여름에는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를 조청하여 《중국인》을 초연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궁정극장 지배인 지아코모 두라초 백작은 궁정의 음악 감독으로 그를 임명하여 빈에서의 글룩의 지위는 결정적이 되었다.

두라초 백작과 글룩의 유대는 이듬해에 《L’innocenz a giustificata》를 낳게 하였다. 이것은 글룩 최초의 개혁 오페라 《오르페우스》의 준비작이라 할 작품이다.

1756년 로마에서《안티고노 (Antigono)》를 공연하였으며, 글룩은 1758년~61년에 걸쳐 6곡의 프랑스 오페라를 작곡했다.

1761년 47세의 글룩은, 이탈리아의 대본작가 칼차비지(Ranieri Calzabigi)를 알게 되어 두 사람이 협력하여 오페라를 이룩하였는데 1762년의 《오르페우스》. 1767년의 《알체스테》, 1770년의 《파리드와 엘레나》의 세 작품이다.

1772년 글룩은 빈 주재 프랑스 대사의 수행원 뒤 룰레(Francois Louis Gand Lebland du Roullet)를 알게 되어 그가 라시느의 비극을 기초로 하여 쓴 대본으로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Iphigenie en Aulide)》를 작곡했다.

예전의 제자이며 당시 프랑스 황태자비로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적극적인 알선으로 1774년 60세의 글룩은 자신 지휘로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를 파리에서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을 얻은 글룩은 《오르페우스》, 《알체스테》를 프랑스 오페라 식으로 개작하였는데 모두 호평을 받아 순식간에 파리에서 그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오페라도 인기가 대단하여 글룩파와 이탈리아파로 갈려 대립하였다.

1780년 글록은 빈에 돌아가 공로와 명예를 함께 누리는 음악가로서 만년을 안락하게 보내다가 1787년 뇌출혈로 73년의 생애를 끝맺었다.

글룩은 18세기 최대의 오페라 세리아의 작곡가로서 모든 국민에게 알맞은 음악의 작곡을 목표로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 다음에는 프랑스의 오페라 양식을 몸에 익히고 거기서 독일적인 중후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배합함으로서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국제적인 오페라 양식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유럽의 오페라계는 오페라 세리아로부터 오페라 부파로 흥미의 중심이 점차 옮겨져 오페라 부파에 나오는 당시 스타일의 인물에 비하면, 글룩 오페라 등장 인물은 어딘지 모르게 낡아 보인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유명한 그것에 비해 현재 그 작품이 공연 기회가 적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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