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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그 (Edvard Hagerup Grieg) 본문

클래식 (CLASSIC)/작곡가 (Composer)

그리그 (Edvard Hagerup Grieg)

장미의 전쟁 2019. 4. 17. 14:07

드바르드 하게루프 그리그 (Edvard Hagerup Grieg)

드바르드 하게루프 그리그 (노르웨이)
Edvard Hagerup Grieg (1843-1907)

서정 모음곡 Op.54
모음곡  「페르퀸트 Op.46 / Op.55
교향 무곡 Op.64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16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c단조  Op.45첼로 소나타 a단조 Op.36
트롤드하우겐의 혼례의 날 (서정 소곡집 제8집 중에서) Op.65, No.6


그리그는 1843년 6월 15일 북대서양에 연한 제1의 항구 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노르웨이의 작곡가이자 대표적인 국민 음악가이며, 피아노 협주곡, 관현악곡, 실내악곡 등 다수의 명곡을 남기고 있는데, 그의 민족주의를 가장 단적으로 반영하여 깊은 맛이 있는 것은 아마도 노르웨이 시인들의 작품을 가사로 한 그의 독창적인 가곡 일 것이다.

그는 당시의 경향이었던, 대곡주의에 반항하여 가곡이나 피아노 소품 등 작은 형식의 음악을 즐겨 많이 썼다. 그것은 가곡만으로도 백수십 곡에 이르는 것으로 증명된다. 그래서 그는 많은 소곡 속에 청명한 풍토로 배양된 순박한 민족의 호흡을, 서정미가 풍부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의 가락은 청순하고 또한 자연스러우며 노르웨이 민요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더구나 고도로 세련된 개성을 지니고 있다. 화성은 독일 낭만파를 답습하면서도 보다 청명하고 독자적인 색채가 풍부하여, 섬세한 음영을 반영 시키고 있다. 

북구의 쇼팽이라고 불리는 그리그는 그 선조가 스코틀랜드 사람인데, 18세기 중엽에 노르웨이로 이주하였고, 어머니는 노르웨이 사람으로 교양있는 피아니스트여서,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12세 때부터 이미 작곡을 시작하였고 1858년에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하여, 대위법이나 그외의 것을 하우프트만 및 리히터에게 배웠고, 리츠 및 라이네케에게는 작곡법을, 또한 피아노는 벤첼 및 모셀레스에게 4년 동안 사사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로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올레 불 (Ole Bull 1810〜1880)에게 그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고, 그의 권유에 따라 독일 음악의 전통을 배울 수 있었으며, 그는 졸업할 때 4곡의 자작곡을 연주하여, 작곡가로서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 인정 받았다.

1862년 고국에 돌아와, 다음 해 코펜하겐에 가서 스칸디나비아 악파의 선구자인 게제 (Gade 1817〜1890)를 방문하여, 격려와 가르침. 즉, 민족주의 음악에의 사사를 받았고, 그때부터 그는 자기가 진정 추구하는 것을 자각하고, 민족주의 방향으로 나아갈 결심을 하였다.

그리그는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목적으로, 노르드라크(Nordraak 1842~1866)와 함께 코펜하겐에 에우테르페 협회를 설립하고, 북방악파가 나아갈 새롭고 명확한 길을 개척하려 하였다. 그런데 노르드라크가 일찍 죽는 바람에 협회의 노력은 중단되고 말았다.

1865년,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리스트에게 인정을 받아, 리스트의 초청으로 로마를 방문하고 그와 교우를 맺었다. 그 해에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관현악곡 연주회용 서곡 《가을에》를 작곡하였다.

그리그는 고국에 돌아와 오슬로 필하모니 협회의 지휘자가되었으며, 1874년 그의 나이 31세 때부터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게 되어 창작에 전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해 입센의 희곡에 붙인 부수 음악에 기초를 둔 조곡 《페르귄트》를 위해 피아노곡을 썼는데,  1876년, 이를 상연할 때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다. 그리그는 1867년에 그의 사춘누이 니나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흘륭한 성악가였으므로 그리그는 가곡을 많이 작곡하였다. 그중에서 《백조》와 《지나간 봄》등은 풍부한 정서 담당한 청춘의 번뇌를 구가한 그의 대표적인 노래이다.

1888년, 그가 영국을 방문하였을 때, 가작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연주하고, 현악을 위한 2개의 작품을 지휘하여 호평을 받았고, 그 뒤 다시 몇 차례 영국을 방문하여 1894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그리고 1906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스웨덴, 프랑스, 베를린과 라이덴 등지에서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03년 그의60회 생일을 맞이했을 때는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물론 구미 각국에서도 그를 축하해 주었고 미국에서도 그를 초청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응하지 못하고 베르겐에게 사망하였다.

그리그의 작품은 독일 낭만파에 가깝다. 그러나 노르웨이 음악 문화에 민족적인 의식을 넣어 활력을 갖게 한 이가 바로 그리그였다. 그리고 그는 조국 민요의 광맥을 파해지고, 거기서 국민적인 예술을 탄생시키려고 애쓴 작곡가였다. 보헤미아의 스메타나처럼 그리그는 베르겐에서, 노르웨이 국민음악파의 기초를 쌓고, 북유럽의 무용과 민요, 그리고 노르웨이 농민의 춤을 작곡, 편곡함으로써 민중에 전승해 오던 음악에 접근했다.

대규모의 기악곡까지 포함하여, 그리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그의 독특한 매력은 모국의 민요에 대한 친근감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바로 이것이 그리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차이코프스키는 그리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그의 음악은 브람스의 그것에 비하여 숙달도에서 많이 떨어지고, 고상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 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다른 작곡가들보다 이해하기 쉽고, 기분좋은 음악을 쓴다. 그것은 그가 매우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그의 음악을 들으면 직관적으로, 압도적인 정열과 높은 시적 정감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한 인간이 우리에게 말하는 듯이 느끼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극장 음악을 비롯하여 여러 방면으로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관현악 작품을 살펴보면, 유명한 《페르 귄트》는 원래 입센의 의뢰로 작곡한 극음악으로 1875년 완성되었다. 이 극이 상연된 후, 그리그 자신에 의하여 2개의 관현악용 모음곡으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이 모음곡이 더 유명하다. 《페르 귄트》외의 모음곡으로도 《십자군 병사 시구르》와 《홀베르그 시대에서》가 있다.

이 외의 관현악곡으로는 《노르웨이 무곡》과 《2개의 노르웨이 선율》이 있다. 《노르웨이 무곡》은 그리그가 피아노 2중주용 무곡집으로 38세 때에 작곡한 것인데, 뒤에 관현악곡으로 편곡이 되어서 이것이 원곡보다 더 유명해졌다.

그 밖에 피아노 독주용으로도 편곡이 되었으나 관현악곡이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2 개의 노르웨이 선율》은 현악 합주용 작품으로, 주제는 전부가 자작이 아니고, 친구의 것이나 노르웨이 민요에서 빌려 오고 있는데, 그리그답게 노르웨이 전원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작품들이다. 그리그와 매우 친하게 지냈던, 차이코프스키는 그리그의 음악에 대하여, 그의 음악은 마음을 녹일 듯한 애수가 들어 있는데, 이것이 때로는 크게 번져서 장엄하고 숭고해지고 때로는 잿빛으로 무겁게 흐르면서 인간의 심금을 파헤치는 듯한 느낌이 우리 러시아인의 음악과무척 닮았고,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우리 마음에 빨리 녹아든다. 그의 음악은 노르웨이의 그 아름다운 풍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 느껴진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리그의 음악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모음곡 《페르 귄트》와 피아노 콘체르토 A 단조이다. 그리그의 피아노 콘체르토는, 이 A 단조 한 곡뿐이지만, 모음곡 《페르 귄트》와 함께 그의 이름을 높여 준 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으며, 그의 음악적 매력을 남김없이 발휘한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노르웨이 민요풍의 청순한 선율과 신선한 화성, 절묘한 리듬 등 그 소재가 신선하다 할 수 있다.

특히, 이 곡은 작곡된 당시의 그의 행복한 제반 사정을 반영하여, 생기 발랄한 젊은 정열에 넘치고 있다. 작곡가 자신이 피아노의 명수여서, 악기의 성능을 충분히 살린 자유 분방한 표현을 하고 있으며, 기교적인 면에서는 리스트에 가까워 지고 있다.

그리그의 오케스트라곡은 악기의 색조를 강조하고 리듬을 두드러지게 하여, 지극히 국민악파다운 수법을 보여 주어, 그 나름대로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소나타나 협주곡 등에서는 주제 전개 방식이나, 구성상의 의지면에서 다소 연약성을 느기게 하는 점도 있고, 또한 얼마간 상투화된 듯한 화성 처리나 대위법 처리에 있어서의 불완전함은 부정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떨어진 스칸디나비아의 민족적 의식에 눈뜬, 수준 높은 음악의 부피를 견고하게 심은 선각자로서, 그리그의 위치는 음악사상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하고도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역은 몇 개의 가곡과 10집으로 된 피아노곡 《서정 소곡집》에서 볼 수 있는 서정적인 섬세함이 보인다 하더라도, 노르웨이 국민음악의 힘찬 추진자로서 그의 업적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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